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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

<p>(목원대학교 이정순 교수께서 코로나19와 관련된 글을 보내왔다. 아래는 글 전문이다.)</p>

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

이정순 교수(목원대 신학과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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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연일 확산되고 있다 . 누구도 예측 못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.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애를 쓰고 있다 . 감염을 막기 위해 실시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종교계 역시 건물 중심의 의례 행위를 자제하고 온라인이나 가정에서의 의례로 대체하고 있다 . 이 시점에서 기독교계 역시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. 그러면서 또 일부에서는 여전히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고집하면서 이것을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신앙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. 어떤 이들은 전쟁 때도 중단하지 않았던 예배를 왜 중단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면서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. 물론 생명을 우선시하는 이 위중한 시기에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. 얼마 전 대구의 신천지로 바이러스 감염자가 폭증하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. 일반 시민들의 눈에는 이제 신천지든 정통 교회든 하나로 보이는 듯하다 . 정말 바이러스에 의해 다수의 고귀한 생명이 원치 않는 죽음을 맛보고 있는 시대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. 생명이 먼저인가 아니면 종교가 우선인가 하는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. 며칠 전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주일 예배를 강행하던 한 목사가 구속된 일이 일어났다 . 이 사람은 주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행정명령을 무시한 채 3 29 일 주일 두 차례에 걸쳐 수백명이 모이는 예배를 개최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. 물론 보석금을 내고 바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도 교회 예배를 제한할 정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얼마나 위중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. 이 목사를 기소한 검사는 기자회견에서 , " 주 정부의 행정명령은 헌법적으로 유효하다 " 라고 언급하면서 마가복음 12 31 절을 근거로 해서 "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으며 , 이웃을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노출시켜 건강을 해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" 라고 지적했다 . 만일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다 .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은 물론 현재 많은 서구의 나라들이 종교 집회를 금지하고 있다 . 그 대신 각자가 있는 곳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온라인을 통해서든 아니면 개인이나 가족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든 종교 의식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다 . 종교인이라면 당연히 거룩한 예배당이나 종교 시설에서 종교의식을 갖는 게 당연할 텐데 ,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 특별한 시기인 만큼 한 발자국 물러나 달라는 특별 요청인 것이다 . 물론 이런 식의 특별 예배에 머무르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안에서 함께 동영상을 시청하는 형태의 예배도 시행되고 있다 . 미국의 한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를 드라이브 쓰루 형태로 받고 있다고 한다 . 신자는 차에 탄 채 창문만 열고 신부는 2 미터 쯤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신자의 고해성사를 듣는다는 것이다 . 특별한 시대에 신앙을 쌓아가는 다양한 방식이 매우 흥미롭기까지 하다 . 하지만 여전히 종교 시설에서의 종교 예식 , 즉 예배당에서의 예배만이 유일한 신앙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많은 것 같다 . 예배당을 성전으로 생각하고 사모하는 그들의 신앙을 존경하면서도 , 이 역시 기독교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. 예배란 무엇인가 ?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성행하는 시대에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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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독교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약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. 구약 시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 예배의 강화였다 . 그때까지 법궤를 모시고 광야 이곳 저곳을 이동하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거대한 왕국이 되면서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를 강조하게 된다 .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야훼 하나님 , 200 여년 동안 왕 없이 사사 체체를 유지 시켜주었던 엘로힘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갇히게 되었다 . 세상 한 복판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.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일원은 누구든지 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하고 , 최소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직접 와서 동물을 희생제로 드려야 했다 . 그래야 자신들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다 .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너무 크고 화려하게 짓다가 무리를 일으키게 되었고 ,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된다 .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, 북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했다 . 이것이 성서적으로 사마리아인의 기원이다 .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. 성전이 두 개가 생겼기 때문이다 .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 년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하여 이방인들과 섞이기 시작했고 , 남유다는 기원전 586 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해 포로로 끌려갔다 . 신앙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 방문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. 이국땅에서 절망하던 이스라엘 인들은 이제 성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다 . 그래서 이들은 마을 회관과 같은데서 모이기 시작했고 , 그곳에서 율법을 공부하면서 자녀들의 신앙을 교육했다 . 이것이 회당의 시초이다 . 여기서 등장한 율법전문가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. 이스라엘이 고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잠시 복구했지만 , 희랍과 로마의 침략을 당했다 .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70 년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 역시 서쪽 벽만 남긴 채 완전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. 이런 역사적 배경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기독교의 성전 개념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.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유대교식으로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. 요한복음 4 장에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것을 잘 살펴보면 이런 성전 중심 , 장소 중심의 예배는 이제 중단되었음을 알게 된다 .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 말미에 예배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. “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,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”(20 ).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. “ 너희가 아버지께 ,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,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,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. . .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.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.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. 하나님은 영이시다 .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”(21-24 ). 예수님 당시까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.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고 , 사마리아인들은 이 산 이라 지칭한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. 그러면서 각자 자신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주장했다 . 이런 맥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 .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 ”(21 ) 라고 말씀하셨다 .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. 예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, 그 어떠한 화려한 성전도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. 하나님보다 예배 장소나 예배의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. 어디서든 개인이나 집단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. 24 절의 영과 진리로 ”( 새번역 성서 ) 개역 성경 에서는 신령과 진정 으로 번역했는데 , 본래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. 이 표현은 헬라어 엔 퓨누마티 카이 알레세이아 ( έν πνεύματί και άληθεία )” 를 번역한 것인데 , “ 영과 진리 ”(in spirit and in truth) 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. 공동번역 성서 에서는 이 말을 영적으로 참되게 라고 번역했는데 ,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 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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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독교에서 예배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.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나서 오늘날과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. 초대교회는 지금과 같은 정형화된 형식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. 후에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예배가 정착된 것이다 . 에베소서 5:19-20 에 보면 , 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,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면 찬송하십시오 . 모든 일에 ,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라고 되어 있다 . 예배의 주요 요소들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. 또 성경에서는 일요일 오전 11 시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라고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 .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다음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 날 모임을 가졌는데 , 이후 이것이 주일예배로 정착되었다 .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 한 모퉁이에서 예배를 드리다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쫓겨났고 , 이후 곳곳에 흩어진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. 특히 로마의 극심한 박해 시기에는 그마저 힘들어서 비밀리에 모였고 , 지하 동굴에서도 모였다 . 이렇게 신자들이 모인 모임 그 자체가 에클레시아 ’( 세상으로부터 불러내다 ), 즉 교회이다 . 그래서 그 어느 곳에서든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 ( 18:20) 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는가 ? 그렇다면 이 두 세 사람도 모이지 못하면 예배는 불가능한 것인가 ? 바울서신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( 고전 6:19, 3:16) 라고 선포한다 . 이미 성도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? 각자 처해진 상황 하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리면 그것 역시 훌륭한 예배라는 것이다 . 로마서 12 1 절에는 , 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.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.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실천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. 삶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.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.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전통을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. 하지만 예배당에서 드리는 주일 11 시 예배를 잠시 중단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은 중단되거나 교회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다 . 온라인이라는 과학 기술을 도구로 하는 예배든 , 가정 단위로 드리는 가정 예배든 , 또 혼자 드리는 예배든 , 시간과 장소 및 방법에 제한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.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참된 예배 , 진정한 예배는 장소나 시간 또는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.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, 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신 기술을 도구로 하여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,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예배의 본질이다 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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